모든 것은 저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터넷 시대를 살면서 모든 것이 저장되어 보존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24년 9월 22일 BBC 기사에 의하면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만들어젠 웹 페이지 중 약 25%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던 정보들─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사진, 그리고 인터넷 게시글까지─언제든 증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장 블로그에서도 여러 사례를 다뤘다. 예를 들어, <오늘을보내>의 경우에는 밀림닷컴 홈페이지 자체가 폐쇄되면서 수색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들은 전부 로스트미디어의 개념에 속한다. 언젠가, 어디서, 한 번쯤은 봤음직한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사진뿐 아니라 인터넷 게시글까지. 모두가 저장되지 않는다. 일부는 아예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도대체 왜 나타나는 것일까?
기술적 한계나 보관 실수 같은 문제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있다. 바로 저작권이다. 특정 미디어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저작권이 유효하면, 복원하고 싶어도 법적인 문제로 인해 영영 공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최악의 경우,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주체가 해당 미디어에 관심이 없어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기도 한다. 이렇게 무관심의 영역에서 표류하다가 영영 빛을 보지 못하는 미디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을까? 일각에서는 그 대안으로 카피레프트(Copyleft) 개념을 주장한다. 카피레프트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한 리처드 스톨먼 교수가 시작한 운동으로 저작권의 독점적인 의미에 반발해 생겨난 '모든 프로그램이나 정보 및 미디어는 소수에게 독점되어선 안 되며, 자유롭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즉, 소유권은 저작자가 갖되 수정권 및 배포권을 공공의 소유로 하자는 것이다. 만일 카피레프트가 널리 퍼진다면 로스트미디어의 발생을 막을 수 있을까? 또한 항상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로스트미디어와 저작권의 법적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저작권으로 인해 로스트미디어가 된 사례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니혼도라>이다. 1973년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닛폰 테레비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으로 도라에몽 프랜차이즈의 첫 애니메이션이지만 현재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원작자인 후지코 F. 후지오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고, 현재 저작권자인 후지코 프로가 이 작품을 공개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당시 <니혼도라>의 제작 주임이던 마사미 준은 일부 필름을 보관 중이고, 2006년부터 무료 상영회를 실시했으나 2011년에 후지코 프로의 상영회 중지 요구를 받아 무료 상영회는 중단되었다. 당시 마사미 준은 '비영리, 무상, 무보수'의 경우 저작권자 허락 없이 상영회 개최가 가능하다는 저작권법 조항에 따라 불법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후지코 프로의 강한 압박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니혼도라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하고 로스트미디어가 되었다.
그 외에 다른 사례로는 비틀즈의 데카 오디션 테이프가 있다. 데카 오디션 테이프는 비틀즈가 1962년 데카 레코드 오디션에서 녹음한 테이프다. 비틀즈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지만, 데카 측에서 비틀즈에게 계약 제시를 하지 않았다. 이후 비틀즈의 매니저인 엡스타인이 비틀즈와 계약할 음반사를 찾는 데 쓰겠다는 조건으로 오디션 테이프를 받았고, 그게 전부였다. 데카 측에서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이 오디션 테이프를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70년대부터 해적판으로 시장에 유출되어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공개되긴 했지만.
이런 사례들을 보면 저작권자가 저작권을 보유한 채로 복원 및 배포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로스트미디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많은 미디어들이 저작권 보호로 인해 공개되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다. 당연히 저작권 보호는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콘텐츠가 소비되어 존재 가치를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콘텐츠는 결국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 존재 가치가 생긴다. 저작권에 갇혀 상호작용 없이 가만히 있는 콘텐츠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카피레프트의 가능성과 한계점
리처드 스톨먼이 제안한 카피레프트는 저작권자의 저작권은 유지하되, 수정 및 배포 권한을 공공에 개방하는 방식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이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존재하지만, 이들과 다르게 카피레프트는 자유로운 공유를 강제한다.
카피레프트가 널리 도입된다면 로스트미디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러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번째, 미디어의 자유로운 공유가 가능해진다. 저작권이 지나치게 강하게 보호되지 않기에 개인 및 커뮤니티가 미디어를 보존하고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또, 저작권이 있는 로스트미디어를 복원할 때 법적인 제약이 줄어든다. 두번째, 아카이브 구축을 촉진시킨다. 카피레프트 기반으로 콘텐츠가 배포될 경우, 개인 및 커뮤니티가 콘텐츠를 보존해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훨씬 쉬워지고 법적인 제약에서도 자유로워진다. 마지막으로 저작권자의 저작권은 보호되기에 저작권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이 작품을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당연히 카피레프트에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만능열쇠였다면 지금 당장 도입되지 않겠는가? 첫번째 문제점으로는 현실적으로 기업과 대형 저작권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디즈니, 넷플릭스, 워너 브라더스 등의 대기업은 카피레프트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 입장에서 콘텐츠의 공유 및 배포권이 공공에게 개방될 경우 수익 모델이 완전히 붕괴되기 때문이다. 두번째, 일부 콘텐츠는 수정 및 배포가 어렵다. 특히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이 의도와 다르게 변형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때도 있다. 페페의 작가가 페페가 대안우파의 아이콘으로 활용되자 장례식을 치룬 사례도 있다. 마지막으로 법적 충돌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현재 저작권법은 카피레프트를 고려하지 않은, 전통적인 저작권 보호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게다가 국가마다 저작권법의 범위와 권한이 다르기 때문에 전세계에 통용되는 카피레프트를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실적인 가능성
로스트미디어를 방지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카피레프트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첫번째로 공공 아카이브를 강화한다. 이미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에서는 디지털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미국의 인터넷 아카이브, 호주의 판도라프로젝트, 뉴질랜드 국립도서관읜 NDHL(National Digital Heritage Archive) 프로그램, 유럽의 IIPC(International Internet Preservation Consortium)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정부와 비영리 단체가 주도해서 이미 공공 아카이브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지원이 더 강화된다면 로스트미디어가 생기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퍼블릭 도메인 전환을 촉진한다. 저작권 보호 기간을 줄이거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퍼블릭 도메인으로 전환하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한다. 현재 한국 기준 영상의 경우 공표 후 70년, 기타 저작물은 저작자 사후 70년이 되어야 퍼블릭 도메인으로 전환된다. 이를 줄이거나, 아니면 저작권이 수익과 관련된 문제이니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유의미한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퍼블릭 도메인으로 전환하게 한다던지. 이런 수정안이 만들어진다면 로스트미디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번째, 제한적인 카피레프트를 도입한다. 현재의 저작권법과 함께 운영되며, 초기에는 저작권을 강하게 보호하는 원 법안을 따르고, 일정 기간 후에는 카피레프트를 따라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결론
로스트미디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적, 제도적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저작권 보호는 창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창작의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보호는 콘텐츠의 소멸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때 카피레프트가 중요한 대안으로 떠오른다.
카피레프트는 저작권과 로스트미디어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업과 법적인 시스템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카피레프트의 완전한 도입이 아닌 공공 아카이브 강화, 퍼블릭 도메인 촉진, 카피레프트 제한적 도입 등의 현실적인 절충안을 고려해야 한다.
결국, 로스트미디어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록과 공유다. 수많은 미디어들을 로스트미디어 신세에서 벗어나게 한 인터넷 아카이브의 예시를 떠올려보자. 이들은 과거의 미디어가 사라지지 않도록 수많은 것들을 보존하고 공개했다. 이처럼 우리는 로스트미디어를 방지하기 위해 카피레프트를 비롯한 어떤 방식으로든 미디어 유산을 지키기 위한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
기록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은 것은 잊혀진다. 그리고 잊혀진 것은 사라진다.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그리고 잊힌 것들을 발굴하기 위해 카피레프트 등의 다양한 방법을 찾고, 그를 위한 논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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