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심청
<왕후 심청>은 어쩌면 어렸을 적에 당신들이 봤을 애니메이션일지도 모른다. 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심슨 가족>과 <트랜스포머 1세대(G1)>을 작업한 것으로 유명한 애니메이터 넬슨 신(한국 이름: 신능균)이 감독을 맡았다.
<왕후 심청>은 ㈜코아필름서울, 코아필름(미국) 그리고 북한의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가 공동으로 참여해 제작기간 7년, 제작비 70여 억 원을 들여 제작했다. 이는 넬슨 신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으며, 그가 직접 북한을 오가면서 현지 인력과 협력해 주문제작방식(OEM)으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음악 또한 북한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북한과 동시 개봉을 진행했다. 2005년 8월 한국과 북한에 동시 개봉했는데, 북한에서는 국제영화관, 개선문 극장 등 평양의 6개관에서 개봉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였지만, 성과는 좋지 못했다. 제작비는 70여 억 원이 들었지만 총 관객수 75,957명을 기록하면서 제작비 회수도 하지 못한 채 망하고 만다. 더불어 평론가들의 평가도 애매하게 나오면서 아쉽게도 <왕후 심청>은 실패한다.
<왕후 심청>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진다.
충신이자 훌륭한 재상이었던 심학구의 외동딸로 태어난 청이. 그러나 아버지 심학구 대감이이러니 대감을 비롯한 역적 일당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집안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심학구도 눈이 멀게 된다. 그로부터 14년 후, 아름답고 착한 소녀로 자라난 청이는 항상 듬직한 단추(삽살개), 말썽 많고 수다스러운 가희(거위), 졸린 눈을 껌뻑이는 터벙이(거북이)와 함께 앞을 못 보는 아버지를 모시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공양미 삼백석이 있으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청이는 바다에 사는 인당수 괴물의 산제물이 되기로 결심하고 삼백석에 팔려간다.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몸을 던진 청이는 위기 끝에 바다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용왕의 도움으로 연꽃에 실려 세상으로 돌아온다. 궁궐로 보내진 연꽃 속의 청이는 심학구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어느 마을 주막에서 뒤늦게 맹인 잔치 소식을 들은 심학구는 청이를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급하게 발길을 돌리는데...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심청전>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괜한 각색이었다는 평가도 있었고,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호평도 존재했다. 영화는 개봉하기 전에 2004년 SICAF 장편 애니메이션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캐나다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안시(Annecy) 프로젝트 경쟁부문 특별상, 히로시마 초청 상영 등에도 성공했다. 이렇게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나름의 의미와 성과를 거둔 작품인 <왕후 심청>. 하지만 그 작품은 현재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왜 볼 수 없는가
<왕후 심청>은 DVD, VHS, VOD, 스트리밍, 그 어느 곳에서도 서비스하지 않는 작품이다. 분명 흥행에 실패했고, 어느정도 손해를 줄이기 위해 2차 시장에 사활을 걸었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2차 시장으로 나오지 않았다. 요하네스 쇤헤르(Johannes Schönherr)가 북한에서 단독으로 DVD 출시 되었다는 식의 언급을 했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다.
넬슨 신과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는 로스트미디어 위키의 한 유저는 이 영화는 어떤 플랫폼에서도 볼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2007년에는 East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상영되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이는 Asian Heritage Month Asian Film Festival(아시아 문화의 달 영화제)라는 이름의 영화제에서 상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왕후 심청>은 이 이후로도 '영화제'에서만 모습을 보였다. 2차 시장에 나오지 않았지만, 영화제에서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실제로 2019년, 평창남북평화영화제에서 <왕후 심청>이 상영되었다. 영화제는 '비상업적 목적의 상영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저작권과 무관하게 상영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이런 영화제에만 나오는 것은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일까? 남북 합작으로 제작되었기에 저작권 문제가 매우 복잡한 것일까?
하지만 저작권이 문제일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다. 왜냐하면 북한에게는 주문제작방식(OEM)으로 맡겼기에 저작권 자체는 한국의 회사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필리핀 업체에 OEM을 맡겼다고, 필리핀 업체가 저작권을 문제로 상영을 못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북한에서도 <왕후 심청>의 저작권을 가지고 태클을 걸 가능성은 낮다.
실제로 별안간이라는 문화 복합 공간에서는 영화제작사의 협찬으로 2019년 6월 15일, <왕후 심청>의 상영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저작권을 가진 제작사가 존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왕후 심청>은 과연 무슨 이유로 사라진 것일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까?
2017년, 통일부의 블로그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면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애니메이션 상영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댓글이 달려있다. 이 사실과 함께 넬슨 신의 인터뷰등을 보면 넬슨 신 감독은 이걸 본인의 숙원 사업이라 생각했고, 국가에 기여한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렇기에 아예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무료로 서비스할 수 있게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6월 1일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이 시점(혹은 그 이전)부터 서비스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삭제되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왕후 심청>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꽤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고, 남북화합을 상징하는 작은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2018년 남북회담 이후 평화 무드가 이어지는 것 같던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난다. 2019년 3월, 북한이 개성 연락사무소의 북측 인원을 사전 통보 없이 빼버렸고, 5월에는 미사일 도발을 일삼았다. 화해 무드에서 갑자기 돌아섰으니, 남북화합을 상징하는 작품인 <왕후 심청>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또한 현재 영부인인 김건희와도 연관이 있는데, 김건희가 과거 교수 임용지원서에 2004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고 기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상 수상자는 <왕후 심청>의 넬슨 신 감독이었고, 그는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김건희 씨를 알지 못하며, <왕후 심청>에 기여한 것도 없고, 대선 후보의 아내라는 것만 알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에 윤석열 측에서 미리 아내의 허물을 덮기 위해 <왕후 심청>의 존재 자체를 없애려고 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낮은 추측이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당시 조국을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부와 충돌한 것은 2019년 8월부터였고,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던 것은 2020년부터였다. 댓글에 의하면 2019년 6월 1일(혹은 그 이전)부터 무료 VOD 서비스가 중단된 것인데,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연관은 따로 없어 보인다. 시기상 맞지 않는다.
어쩌면 넬슨 신의 아픈 손가락일지도 모른다
영화제작사인 애이콤프로덕션이 살아있고, 감독인 넬슨 신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영화제 등에서 제한적으로 상영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에 공개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넬슨 신 감독의 숙원 사업이던 남북합작 애니메이션.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왕후 심청>을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하면서 쓴 맛을 봤다. 비록 영화제에서는 상을 탔다지만, 그에 비해 평론가의 평도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의 큰 꿈이 실패했으니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왕후 심청>을 대중에 공개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그가 보냈다는 이메일의 내용이 이해가 된다. 그는 로스트미디어 위키의 한 유저에게 "이 영화는 어떤 플랫폼에서도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성공하지 못한 꿈은 과연 그의 아픈 손가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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