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사진이 익숙한가?
<폭풍소년>이라는 제목은 몰라도, 그 뒤에 가려진 영어 타이틀은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것이다. 바로 <아키라>. 오토코 카츠히로가 만화잡지 <영 매거진>에 연재한 작품을 원작으로 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아키라는 현대 아니메의 표준을 확립하게 되었다.
-로튼토마토 총평
<아키라>는 당시 15만 장의 셀화, 2,200컷의 원화 등 압도적이고 파격적인 규모로 제작되었으며, 첨단 기술을 도입하며 매우 큰 화제를 모았다. 일본에서는 아쉬운 성적을 거뒀지만, 서양권에서는 당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인정받으면서 시대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다. 맥스무비의 평론가 정유미의 "걸작의 조건 중 하나는 생명력이다."라는 말처럼, <아키라>는 사이버펑크와 절정에 달했던 일본 버블경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현대에 와서도 끝없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아키라>는 당시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개봉되지 못했다. 아니 분명히 저 위에 <폭풍소년>이라는 쌈마이한 제목으로 개봉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 그대로다. 정식으로 수입되어 개봉되지 못했다. <폭풍소년>은 홍콩영화로 둔갑되어 수입되었다. 즉, 불법으로 상영되었다는 소리다.
일본 문화 금지부터 개방까지
광복 이후, 한국은 일본 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바탕으로 강력한 규제를 시행했다. 일제강점기를 겪었기에 당연한 일이었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후에도 일본 문화의 유입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물론 <슬램덩크>처럼 일본 대중문화가 완전히 개방되기 전에 정식으로 수입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엄격하게 현지화를 거친 상태로 정식 유통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일본 문화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조금씩 몰래 불법으로 들어오던 일본 문화에 의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가 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당연히 일본 문화에 대한 경계와 반감이 여전히 존재했고,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경로, 특히 해적판으로 대표되는 불법 복제본이 성행했다. 게다가 부산은 일본에서 오는 전파가 잡혔기에 이미 상당히 일본 문화가 많이 퍼져있었다.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에, 김대중 정부가 발족한 이후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완전히 개방하게 된다. 이는 이미 비공식적으로 널리 소비되던 문화를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충격적인 꼼수 개봉, 충격적인 반응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이던 당시, 수입사인 ㈜세라양행(배우 백일섭이 운영하던 수입사, 솔필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짐)은 1990년에 이 작품을 홍콩 작품으로 속여서 심의 요청을 했다. 그 결과 다음 해인 1991년에 극장 개봉을 성사시켰다. 당시 TV에 대대적으로 "폭풍소년! 온가족이 함께 관람하십시오!"라는 멘트까지 넣으며 광고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동명의 홍콩영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세라양행은 <아키라>를 <폭풍소년>으로 속여서 수입하고 심의까지 따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무려 연소자관람가(전체관람가)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살인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하드 한 장면들이 나오는 작품인 만큼, 영화를 보러 갔던 아이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온 가족이 함께 보라는 TV 광고에 낚여 진짜 아이들을 대동하고 왔던 부모들이 많았다고 한다. 칼질을 많이 당해서 상영시간이 40분이나 줄었다고는 하지만, 잔인한 장면들이 다 잘리지는 않았다.
결국 엄청난 항의를 받으면서 논란이 되었고, 홍콩 영화로 둔갑해 거짓으로 심의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일파만파 커진다. 개봉 1주 만에 영화는 상영을 종료했고, ㈜세라양행 또한 영화사 등록이 취소되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당시 흥행 성적은 서울 관객 6,750명이라고 전해진다.
사라진 <폭풍소년>
그리고 <폭풍소년>은 사라진다. <폭풍소년>은 증언에 의하면 당시 강남 뉴코아백화점 극장에서 상영했으며, 그 외에는 인천 희망백화점의 희망극장, 청주 시민회관 등에서 상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더빙의 품질은 조악했다고 하는데, DVDPrime 유저들의 증언에 의하면 <배달의 기수>의 성우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당시 <배달의 기수>는 연극배우, B급 영화배우, 말단 공채 탤런트들이 출연하거나 성우를 맡았다.
이렇게 사라진 <폭풍소년>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필름 자체가 극장용이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매우 컸으며, 아예 언론 보도까지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폐기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디오로 출시조차 되지 못했기에 일반 가정에서 <폭풍소년>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0%다. 때문에 아예 발굴될 희망이 없는 앞으로도 완전히 소실된 로스트미디어로 분류될 확률이 높다. 다만 TV로 나왔다는 광고는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검열을 넘어 기억으로 남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권력자와 동조자들이지 문화가 아니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당연히 일본 문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정부는 이를 검열했다. 그리고 대중들은 다른 길을 찾아냈다.
당시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금지된 영역이었으나, ㈜세라양행이 <아키라>를 <폭풍소년>으로 둔갑해 수입 후 개봉한 것처럼, 대중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일본의 대중문화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폭풍소년>과 같은 사례, 그리고 해적판들은 당시 검열의 흔적이자, 동시에 그 시대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문화적 기억으로 남았다.
대중문화 개방 이후 <아키라>는 한국에서 다시 정식으로 개봉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작 그대로의 <아키라>를 깨끗한 화질과 좋은 음질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폭풍소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로스트미디어가 된 <폭풍소년>은 단순히 우회 수입했다가 사라진 필름이 아니라 검열과 우회가 공존하던 시대가 낳아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폭풍소년>은 단순히 유령 같은 작품이 아니라 과거 한국의 대중이 일본 문화를 어떤 방식으로 향유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시대는 변하고, 검열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흔적은 기억으로 남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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