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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웨이브

국가 권력은 문화를 죽일 수 있는가? 캄보디안 록

출처: unsplash

캄보디아 록의 시작, 그리고 맞이한 황금기

제목이 너무 거창한가? 하지만 이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 이런 비장미 넘치는 제목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캄보디아는 수도인 프놈펜을 중심으로 1960~1970년대에 음악 산업이 번성했던 적이 있다. 당시 캄보디아의 국왕이던 로노돔 시아누크가 대중음악의 발전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캄보디아의 전통 음악,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수입된 레코드, 베트남 전쟁 당시 근처에 주둔하던 미군이 듣던 미국의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캄보디아의 고유 록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 ❘ 출처: 나무위키

 

1953년, 젊은 시아누크 국왕의 지도 하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대중음악의 발전을 꾀했다. 이때 정부 부처에서 아예 자체 오케스트라, 음악 그룹을 두어 공색 행사와 왕실 행사에서 공연하게 했었다. 이때 음악의 세계로 뛰어든 대표적인 뮤지션이 바로 크메르 음악의 왕이자 캄보디아의 엘비스로 불리게 되는 신 시사뭇(Sinn Sisamouth)이다.

 

 

신 시사뭇 ❘ 출처: HMAP

 

1959년경, 미국과 영국의 팝 음악과 초키 로큰롤 음악이 캄보디아에 등장하면서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 중에는 신 시사뭇이 있었다. 그는 당대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록과 개러지 록을 포함, 많은 록 장르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시사뭇은 젊은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하며 그들의 커리어를 만들어줬다. 특히 그와 작업하면서 유명해진 사람이 펜 란(Pan Ron)이다. 그녀는 전통적인 캄보디아의 성 역할을 전복시키는 경쾌한 춤과 선정적인 가사를 기반으로 한 록 음악으로 유명했다.

 

그 외에도 로스 세레이 소테아(Ros Serey Sothea), 휴오이 메아스(Huoy Meas), 욜 아울라롱(Yol Aularong) 등이 보수적인 사회를 조롱하고, 반항하는 록 음악을 펼치면서 캄보디아 록(Cambodian Rock)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게 된다. 당시 음악과 더불어 캄보디아의 영화도 같이 성장하면서 동남아 일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황금기는 길지 않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황금기는 갑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된다.

 

 

킬링필드 피해자들의 사진 ❘ 출처: Getty Images

 

킬링필드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킬링필드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믿기 힘든 잔인한 참상이며, 홀로코스트와 비견되는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다. 킬링필드를 거치면서 캄보디아는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200만명 정도의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처형의 주 목표가 된 사람들은 바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영어를 안다.
굳은 살이 없다.
안경을 썼다.
피부가 희다.
그러면 죽인다.
-당시 유명하던 처형 사유

 

외국어 가능자,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유학생, 중산층 이상의 시민, 스포츠 선수 등 농민과 노동자를 제외한 모두가 학살당했다. 악보를 볼 줄 아는 음악인들은 어떻겠는가? 당연히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크메르 루주 정권 하에 캄보디아의 문화는 멸망한다. 잘나가던 음악과 영화 산업 모두 킬링필드를 겪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학살당했다.

 

 

크메르 루주가 죽인 것은 문화이며,
이 나라의 정신이다.
-리티 판(캄보디아의 감독,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

 

유명했던 아티스트들은 전부 사라진다. 신 시사뭇과 로스 세레이 소테아는 군인에 의해 즉결 처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크메르 루주정권은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던 그들이 주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확한 최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메아스 사몬은 노동 교화소로 끌려가도 음악을 멈추지 않아 처형당했고, 펜 란, 욜 아울라롱 등은 1975년과 1979년 사이에 기록이 사라진 상태로 실종된다. 소수의 뮤지션들만이 겨우 살아남아 조용히 주민들 속에 숨어들었다.

 

 

출처: unsplash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끝났지만, 캄보디아의 록은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그저 시장에서 싸구려 테이프에 담겨 관광객들에게 헐값에 팔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94년, 캄보디아를 관광하던 미국인 폴 휠러(Paul Wheeler)는 씨엠립 인근 시장에서 6개의 테이프를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트랙을 골라 믹스테잎을 완성하게 된다.

 

 

https://youtu.be/i3QPTefh7bQ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의 패러렐 월드 레이블(Parallel World)에 있는 친구에게 들려준다. 친구는 믹스테잎을 듣고 바로 LP 발매 계약을 했고, 곧장 1,000장의 LP가 발매된다. 음반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음반사는 폴 휠러가 사온 6장의 테이프에서 9곡을 더 골라서 기존의 13곡보다 훨씬 트랙이 늘어난 22곡이 수록된 CD를 발매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Cambodian Rocks> 앨범은 평단의 찬사를 받게 된다.

 

 

<Cambodian Rocks>에 대한 평가

<Cambodian Rocks>는 기본적으로 원래 하나의 앨범이 아니었다. 각각의 독립된 음원들이 캄보디아의 시장 상인들에 의해 테이프로 엮여서 팔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폴 휠러가 다시 한번 믹스테잎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트랙만 골라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일종의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앨범은 사이키델릭, 개러지, 서프 록의 영향을 받았다. 거기에 더해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창법, 악기 연주, 댄스 음악의 트렌드가 결합되어 있다. 특히 중심이 되는 아티스트인 신 시사뭇은 서구권의 음악과 캄보디아의 전통 음악을 결합하는 실험을 이끌었던 주인공이었다. The Sydney Morning Herald에 의하면 그는 냇 킹 콜에 비견되는 목소리를 가졌다고 평가 받았다. 롤링 스톤(Rolling Stone)지에서는 "경이롭다"고 평가했고, 파 이스트 오디오(Far East Audio)는 "인스턴트 클래식"이라고 불렀다. 작가인 닉 하노버(Nick Hanover. 작가, 비평가)는 "모순적이어야 할 서양과 동양의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며 융합되고 있다."고 호평했다.

 

전체적으로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당대에 찾아볼 수 없던 서구권 음악과 동남아 전통 음악의 컴필레이션이었다. 예측하기 어렵다고 느낄 정도로 장난스럽고, 모순적이면서도 균형을 이루며 귀를 즐겁게 한다. 첫 곡인 욜 아울라롱의 <Jeas Cyclo>의 오프닝이 그걸 극명하게 드러내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타악기의 박자를 놓칠듯한 의도된 위태로움. 그 다음 아울라롱의 "Cyclo~"(역: 사이클로, 동남아의 자전거 택시)와 함께 울려퍼지는 기타 사운드. 몇 소절 부르고 나오는 솔로 연주. 별다른 설명 없어도 그냥 사이클로를 타고 둠칫거리는 신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 앨범에 수록된 노래가 다 그렇다. 설명할 필요 없이 흥겹다. 즐겁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슬퍼진다. 이들이 맞이할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짧았던 황금기를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불사른 이들은 시대에 한 획을 그을 명작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기에 이 노래는 미치도록 즐겁고, 슬프다. 이 노래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의 서사가 이 앨범을 그렇게 만든다.

 

 

<내가 잊혀졌다고 생각하지 말아요>(2015) ❘ 출처: 위키피디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다. 자신만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폴 포트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람을 죽였고, 도시를 파괴했고, 문화를 억압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는가.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고,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는 몰락한다. 그들이 사라지고 주민들 사이로 숨어들어가 살아남은 캄보디아의 뮤지션들은 다시 모여서 실종된 업계 동료들을 찾아 나선다.

 

아쉽게도 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이를 계기로 살아남은 뮤지션들이 뭉쳐서 캄보디아의 대중음악을 되살리기 시작한다.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목숨을 잃은 로스 세레이 소테아의 여동생 로스 사부트는 "언니에게 바치는 헌정으로 캄보디아 음악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했고, 그녀의 노력은 성과를 거뒀다. 캄보디아 록 뮤지션과 리스너들은 킬링필드의 혼란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LP와 테이프를 찾아서 복제한다. 악독한 크메르 루주 치하에서 암시장 상인들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캄보디아 록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런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내가 잊혀졌다고 생각하지 말아요>(Don't think I've forgotten)이 2015년에 개봉하게 된다. 캄보디아의 예술가 린다 사판(LinDa Saphan)이 감독한 이 다큐멘터리는 캄보디아 록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담았고, 평단의 찬사를 받으면서 다시 캄보디아 록에 대해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덕분에 소수 생존 뮤지션들의 재결합 콘서트, 신 시사뭇 헌정 콘서트 등이 열리게 된다. 캄보디아 록은 훗날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줬으며, 현대에 와서는 캄보디아 오리지널 뮤직 무브먼트(Cambodian Original Music Movement), 크메르 얼터너티브 음악(Khmer Alternative Music) 등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국가 권력은 그들이 부리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통제에만 따르게 만들려고 한다. 보고, 듣고, 즐기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크메르 루주는 농업 생산량 증대라는 거창한 목표를 위해 사람들이 농사에만 몰두할 것을 원했다. 그리고 반항적인 음악에 영향을 받은 국민들이 반기를 들까 걱정하며 뮤지션들을 보이는대로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권력은 무너졌고, 뮤지션들은 돌아왔다. 리티 판은 "크메르 루주는 문화를 죽였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창작자들이 죽어도, 그들이 남긴 유산은 캄보디아 사람들의 머리에, 그리고 가슴에 남았다. 저번에 쓴 게시글인 <디지털 시대만이 가능한 낭만, Panchiko>에서 말했듯이 음악은 경험과 직결되어 있다.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국민들이 공유하는 경험과 정신까지는 억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음악은 끝내 살아남아 다시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다.

 

반디의 <붉은 세월> ❘ 출처: Radio Free Asia

 

북한에 반디라는 작가가 있다. 무려 북한 내부에서 꾸준히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써서 원고를 북한 밖으로 전달해 출간하는 사람이다. 그는 2014년 <고발>이라는 소설집을 출판했고, 영국 PEN 번역상을 수상하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크메르 루주 정권과 북한 정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체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탄압한다. 하지만 그런 탄압이 문화를 완전히 죽일 수 있었는가? 아니다. 캄보디아의 록 음악은 살아남았고, 북한의 문학은 반디라는 걸출한 작가를 탄생시켰다. 겉으로는 완전히 죽어 잊혀진 것 같아도, 문화는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결국 문화는 살아남는다. 언제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