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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웨이브

잊혀진 존재에 대해서, Just Passin' By

https://youtu.be/Gj0ysSOJ7ys

 

3초 동안 녹화된 의문의 영상

2021년 2월 12일, 레딧의 u/e-robotic은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게시글과 함께 3초짜리 영상을 올린다. 영상은 노이즈가 끼어있었고, 한 남성이 기타를 침과 동시에 "world was so easily"라는 가사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3초짜리 멜로디와 가사 한 구절 만으로 노래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 레딧 유저 u/e-robotic의 이름은 에단(Ethan). 그는 1993년생이었으며, 캐나다 출신이었다. 자신이 갓난아기인 시절 부모님이 카메라로 녹화해둔 홈비디오 영상에서 이 의문의 노래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서른 가까이 나이가 들어갈 때까지 이 영상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음악을 찾아주는 사이트인 Shazam과 WatZatSong에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출처: 에펨코리아

 

집단지성의 힘

레딧의 시간 빌게이츠들은 이 노래의 수사에 들어간다. 이런 일에 워낙 이골이 난 사람들인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특히 이들은 클립 우측의 희미한 워터마크를 통해서 이 영상을 송출한 방송국을 알아냈다. 방송국은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된 캐나다의 컨트리 음악 전문 방송국 NCN(New Country Network).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에서 운영된 방송국이었다.

 

출처: 에펨코리아

 

그리고 Ethan은 아예 문제가 된 홈비디오의 풀영상을 올리게 된다. 3분짜리 영상에는 컬링 경기 중계로 보이는 다른 영상도 녹화되어 있었는데, 이 경기는 캐나다의 여자 컬링 대회인 Scotties Tournament of Hearts의 1996년 중계 방송분으로 밝혀졌다. 이 단서들을 조합한 결과, 유저들은 이 음악과 뮤직비디오가 1995년에서 1996년 사이에 제작 및 발매된 것으로 추측했다.

 

 

1995~1996년 사이, 캐나다에서 발매된 컨트리 음악

 

 

유저들은 이 시기를 중심으로 캐나다에서 수색을 이어나갔지만, 노래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에는 실패한다. 직접적인 단서는 3초짜리 영상과 가사 한 구절이었지만, 나머지 간접 증거가 많았기에 해결될 줄 알았던 노래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출처: 레딧

 

찾아내다

그러던 중, 2024년 2월 20일. 약 3년에 걸친 수색 끝에 레딧 유저 u/JadeLily_Starchild에 의해서 이 노래의 정체가 밝혀진다. 노래를 부른 밴드는 캐나다의 Big Picture, 노래 제목은 <Just Passin' By>로 확인되었다. u/JadeLily_Starchild는 캐나다 밴드 슬론(Sloan)의 멤버인 크리스 머피(Chris Murphy)에게 연락해 이 노래를 아냐고 물어봤고, 크리스는 이 밴드를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서 리 로즈버(Lee Rosevere)는 자신의 앨범 컬렉션에서 <Just Passin' By>를 찾아 유튜브에 곡 전체를 올리면서 이 로스트웨이브는 해결된다.

 

 

https://youtu.be/ng_3dTZxKNE

 

놀랍게도 이 노래는 많은 이들의 예측과 달리 1994년에 발매되었고, Big Picture의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다. 노래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틀 뒤, 멤버 중 한 명인 아시프(Asif)와 연락이 닿았고, 아시프는 <Just Passin' By>의 뮤직비디오 전체를 유튜브에 업로드하게 된다. 아시프는 에단이 올린 3초짜리 영상에서 기타를 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Big Picture의 보컬 베니 퐁(Benny Fong)이 1994년에 <Just Passin' By>의 라이브 공연 영상까지 올려줬다. 그들은 Big Picture의 멤버를 모아서 어쿠스틱 버전을 연주해 공개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을 지킨다.

 

 

출처: unsplash

 

디지털 암흑시대

디지털 암흑시대(Digital Dark Age)라는 말이 있다.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도태되는 디지털 데이터 저장 방식이 생긴다. VHS, 베타맥스, 테이프, CD, LD...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게 도태되는 데이터에는 접근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가 오히려 보존성이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런 것들로 인해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정보가 매몰되거나 소멸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를 가리키는 용어를 디지털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Just Passin' By>는 디지털 암흑시대를 겪고 사라졌던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은 아무리 무명 아티스트의 노래도, 인터넷에 올라와 흔적이 남게 된 이상 대부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Big Picture는 그리 유명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방송국에도 몇 번 등장하면서 여러 매체에 한두번은 나왔던 밴드다. 그들을 기록한 기록물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던, 미디어 기술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에서 사라졌다.

 

 

출처: 네이트 뉴스

 

그들이 노래를 발매한 1994년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던 해다. 초창기 인터넷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넷스케이프(Netscape) 브라우저가 출시되었고, 웹사이트들도 등장했다. MP3 기술은 이미 등장했지만, 아쉽게도 인터넷 속도의 한계로 인해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Big Picture는 음반을 기존의 물리적 매체로만 발매했고, 디지털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그 순간, Big Picture는 무명으로 시작하고 무명으로 끝나면서 아카이빙 되지 못했다. 인터넷의 등장과 멀티미디어 혁명이 그들에게는 재앙이었던 것이다. 미디어의 대전환기에 이뤄진 아마 첫번째 디지털 암흑시대에서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들의 존재는 사라졌다.

 

 

출처: unsplash

 

존재에 대해서

I was just passin' by
난 그냥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야...

 

 

이 곡은 인생의 불확실함과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 그리고 지나간 순간에 대한 회상을 주제로 삼고 있다. 노래에서 화자는 누군가를 만나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더 많은 기다림과 고민을 겪는다고 말한다. 노래에서 반복되는 구절인 "I was just passin' by"라는 가사를 통해 곡의 화자는 결국 자신조차 그 스쳐 지나간 순간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 다르게 말하면, 과거 스쳐 지나간 존재에 대한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출처: 브런치 스토리

 

존재하는 것은 곧 지각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

 

 

조지 버클리에 의하면 존재는 곧 인식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마치 원피스에서 닥터 히루루크가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가사에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가? 수많은 변화를 마주하며 흘러가는 세상에서 과거 존재했던 것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면, 그것을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Just the other day was a time in my life
When I thought the song that I sang was new
며칠 전만 해도, 내가 부르는 노래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어.

 

 

<Just Passin' By>는 인지되지 않고 사라졌던 곡이다. 우리가 그 곡을 찾아내기 전까지, 아니 에단이 이 노래가 무엇이냐고 질문하기 전까지 이 노래를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가? Big Picture는 혼란스러웠던 디지털 대전환기에서 자신들의 노래가 맞이하게 될 운명을 직감이라도 했듯이 저 가사를 썼다. 그들은 자신들이 항상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그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직감한다. 화자의 직감처럼 1994년이라는 순간이 스쳐 지나가고, 그들은 인지되지 못한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I never thought the world was so easily won
Just by realzin' that you got somenoe
To say, 'You won't be lonely anymore'
난 세상이 이렇게 쉽게 내 것이 될 줄 몰랐어
단지, 내 곁에 누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
'넌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로

 

 

그러나 <Just Passin' By>는 다시 자신의 존재를 찾았다. 곡의 가사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이 곡은 에단이라는 사람으로 인해, 그리고 그로 인해 이 노래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다. 존재는 단순히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마치 내 곁에 누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 세상이 내 것이 되는 기분을 받은 화자처럼.

 

화자는 마지막에 "I was just passin' by"라는 말을 통해 그런 관계마저도 스쳐 지나가는 순간적인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 말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관계들마저 순간적인 것이며, 그건 모두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곧 모든 로스트웨이브에 적용되는 말이다. 모든 로스트웨이브는 단 한 명이라도 듣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그 노래를 들었던 순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잊혀진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로스트미디어 커뮤니티가 이런 사라진 음악을 찾아내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정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Just Passin' By>는 자신들의 노래 가사처럼 스쳐 지나가서 존재하지 않는 채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그들은 증명을 통해서 존재했음을 알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