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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웨이브

디지털 시대만이 가능한 낭만, Panchiko

Panchko - <D>E>A>T>H>M>E>T>A>L> ❘ 출처: 4chan

 

아쉬운 것은 없었습니다.
밴드의 해체는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어요.

-Owain Davies. 보컬과 기타 담당

 

학창시절, 당신은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밴드를 결성한다. 같은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는 마음 맞는 동네 친구들. 밴드를 만든 후 성인이 되어 누구는 대학을 가고, 누구는 취직을 하며 3년 남짓한 시간의 활동 기간을 끝으로 밴드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을 30장 정도 만들어 지인들과 음반사에게 돌리고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걷는 동안, 30장 정도 만들었던 그 앨범 중 하나가 중고품 가게에서 팔리게 된다. 그리고 그 앨범은 전 세계를 뒤흔들게 된다. 그걸 나중에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까?

 

오늘 소개할 로스트웨이브는 가장 성공했으며, 오로지 디지털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낭만을 보여준 밴드 Panchiko의 <D>E>A>T>H>M>E>T>A>L>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 ❘ 출처: visla.kr

 

Panchiko의 시작

1997년, 영국 노팅엄의 작은 마을에서 오웨인, 앤디, 숀, 존. 이렇게 네 명의 친구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들은 매우 마음이 잘 맞았고, 취향과 취미도 비슷했다. 그들은 일본 문화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앨범 아트는 <민트향 우리들>에 나오는 장면이고, 밴드명인 Panchiko 또한 빠칭코(Pachinko)의 오타였다. 앨범 수록곡인 <LAPUTA>는 <천공의 섬 라퓨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고향인 노팅엄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소규모 공연을 했고, 데모를 완성해서 여러 음반사에 돌려보기도 했다. 젊은 날의 치기이긴 했지만, 열심히 연습하고 녹음해서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이 유명해지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이들은 성인이 되면서 전부 각자의 길을 걷기로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판치코라는 밴드는 노팅엄의 작은 마을에서 "아, 친구들끼리 만든 밴드가 있었지." 정도의 추억 정도로 남으며 사라지게 된다.

 

그들은 해체 전, 마지막으로 CD를 만들어 30장 정도를 지인들과 음반사에게 돌리고 해체한다. 이때 피어즈 판다 레코즈라는 음반사에서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계약 체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16년이 지난다.

 

 

CD의 정체에 대해 묻는 4chan 게시글 ❘ 출처: 4chan

 

4chan에서 시작된 수색

"님들, 이거 중고 가게에서 샀는데 이 CD에 대한 정보 있으신 분?"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게시글이 4chan에 올라온다. OP(Original Poster)는 옥스팜(Oxfam)이라는 자선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 가게에서 CD를 구매했다고 밝힌다. 흥미로운 CD의 등장에 4chan의 유저들은 CD에 수록된 음원을 듣고 싶다고 했고, OP는 이에 호응해서 유튜브를 통해 음원을 올리게 된다.

 

 

https://youtu.be/bDUasZLyMk8

 

매우 열화된 음원인지라 음질이 좋지 못했고, 디스토션이 많이 들어간 곡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을 뚫고 노래는 듣는 이들 모두에게 다가왔다. 몽환적인 멜로디를 바탕으로 드림 팝, 인디 록 등의 다양한 장르가 적절하게 혼합된 이 앨범은 모두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노래를 들은 네티즌들은 음악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좋은 노래가, 그리고 이 노래를 만든 밴드가 주목 받지 못하고 중고 가게 구석에 묻혀 있었다니! 당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은 이 노래를 만든 밴드를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4chan, 레딧, 로스트미디어 관련 디스코드 채널 유저들이 모여서 밴드와 앨범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집단지성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

 

 

<민트향 우리들> 5권 95페이지 ❘ 출처: 디시인사이드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

찾아내다.

먼저 그들은 앨범 아트에 주목한다. 의외로 앨범 아트는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민트향 우리들>이라는 유명한 만화 속 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후로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하면서 네티즌들은 OP가 올린 CD 사진에 주목한다.

 

 

CD 바코드에 숫자가 보인다

 

앨범에 붙여진 바코드. 그리고 바코드 스티커에는 1510이라는 번호가 쓰여져 있었다. 네티즌들은 옥스팜과 숫자를 조합해 검색하고, 한 가게를 특정해내는데 성공한다. 바로 노팅엄에 있는 옥스팜 중고 가게.

 

 

oxfam 1510을 검색하면 나오는 가게 ❘ 출처: 직접 검색

 

이를 통해 네티즌들은 이 CD가 팔린 곳이 노팅엄이니, 노팅엄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오웨인, 존, 숀, 앤디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을 찾기로 한다. 그러나 노팅엄의 인구는 수십만명. 당연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 없는,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생이 빛을 발한 것일까. 드디어 며칠 만에 밴드 멤버 중 하나인 오웨인 데이비스를 찾는데 성공한다. 오웨인은 당신이 이 CD에 적힌 오웨인이 맞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을 보낸다.

 

 

네,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16~17살이었던 것 같네요.
영상에 있는 잡음은 원본에서는 없던 것입니다.
현재 앨범을 가지고 있지 않아 원본을 공개하기는 힘듭니다.
예전 멤버들에게는 연락해보겠습니다.
-Owain Davies

 

 

오웨인은 원본에 잡음이 없었다고 말한다. 네티즌들은 여기서 우리가 들었던 음원은 CD 부식 현상 때문에 잡음이 섞여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CD-R(Compact Disc-Recordable)은 디스크 부패(Disc Rot)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CD-R은 레이저로 화학 염료를 태워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학 염료는 자외선, 혹은 높은 습도에 장시간 노출되면 변형이 일어나 디스크 부패가 일어난다. 판치코의 <D>E>A>T>H>M>E>T>A>L> 앨범 역시 긴 시간 제대로 보관되지 못했기에 디스크 부패가 일어난 것이다.

 

아무튼, 오웨인은 다른 멤버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그 결과 멤버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기타리스트였던 앤디 라이트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하는 중이었기에, 곡의 복원을 시도한다고 알린다. 아쉬운 것은 앨범의 원본은 그들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당시 사용했던 장비도 모두 처분한 상태였기에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는 사운드 엔지니어니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Andy Wright. 기타와 샘플링 담당

 

 

앤디는 포기하지 않았고, 복원을 시도한다. 그리고 2020년 2월 11일, 친구에게서 상태가 좋은 CD를 받았다는 글을 올린 그는 2020년 2월 16일, 밴드캠프를 통해서 <D>E>A>T>H>M>E>T>A>L>의 공식 앨범을 발매한다. 이 앨범에는 기존에 공개된 곡들 말고도 미공개 곡들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https://youtu.be/L3yv7gR_3tU

 

그들은 앨범 발매와 동시에 수많은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RYM(Rate Your Music)에 그들의 앨범은 5점 만점에 3.66점이라는 비교적 높은 평점을 받으며 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들의 철없던 시절, 젊은 날의 추억은 다시금 그들을 꿈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17살 때, 밴드를 만들어 성공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포기해야 했던 그들은,

20년 후 누군가 구매한 중고 앨범 1장으로 인해
어릴 적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유튜브 댓글 중 

 

 

https://youtu.be/4ANf0QLIcpg

 

그렇게 그들은 20년 만에 재결합하고, 노팅엄에서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게 된다.

 

 

 

 

오로지, 디지털 시대라 가능했던 낭만

만일, 이것이 1990년대 이전의 일이라고 생각해보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다. 첫 번째로, CD에 대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두 번째로는 CD의 음원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해 이 CD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이 노래를 만든 주인공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판치코의 성공신화는 오로지 디지털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낭만이었다. CD에 대한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고, 노래를 인터넷에 올리고, 노래를 좋게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토의하고, 최종적으로는 밴드 멤버를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판치코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

<D>E>A>T>H>M>E>T>A>L>의 성공은 디스크 부패현상으로 인한 잡음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잡음은 베이퍼웨이브(Vaporwave)의 유행과 맞물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되던 2000년대 초반을 추억하는 이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했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앨범 아트, 그리고 앨범에 담긴 뒷 이야기까지. 전부 추억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찼으니 어쩌면 그때가 아니라 지금 성공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 앨범을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그저 추억팔이와 비하인드 스토리 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제 앨범은 단순히 노래로만 평가하기는 힘든 것이 되었다. 아이돌은 비주얼이 포함되어 평가를 받고, 다른 종류의 가수들도 마찬가지로 노래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판치코만 가지고 있는 이 레거시는 앨범을 논할 때 배제할 수 없는 요소다. 이 앨범은 시간이 쌓이며 동시에 층층이 쌓인 레이어가 가치를 더해 완성시켜준 것이다. 우리가 웹툰을 볼 때, 각종 효과가 담긴 레이어를 다 빼고 순수 스케치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음악은 본질적으로 경험과 직결된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리고 보고 들었던 시공간이 함께 기억된다. 이 앨범은 우리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 힘을 더 강화해준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의 치기로 도전해보고, 시도해보고, 그리고 처절하게 실패해보고, 좌절해본다. 이 앨범에는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마침내 20년만에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뤄낸 신화가 담겨있다. 이 앨범을 듣는다는 것은 그 신화를 함께 소비한다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로스트웨이브라는 장르의 특징이고, 로스트웨이브라는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자산이다. 로스트웨이브는 단순히 추억팔이를 위해서 잊혀진 노래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다. 잊혀진 명곡에 서사를 부여해서 미완성인 곡을 완성시킨다. 이것이 로스트웨이브 발굴의 진정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