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록: 바위(Rock)를 부수다
포스트 록. 전통적인 록 음악과는 다르게 실험적인 사운드에 집중하는 새로운 형태의 록 장르. 사실 장르라기보다는 실험적인 기법을 접목하거나 해체해 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려는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세월이 지나면서 일정한 형태의 장르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 뭐기시... 문화나 사상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어떤 단어 앞에 포스트(Post-)가 붙은 것을 자주 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포스트'의 의미는 쉽다. 바로 '해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해체했고, 포스트콜로니얼은 식민주의 담론을 해체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 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포스트 록은 록이라는 장르를 해체했다.
포스트 록은 록의 구조(구-후렴-구), 사운드(기타 리프, 강한 보컬)를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재건축했다. 그렇기에 포스트 록의 장르 몇몇은 얼핏 들으면 이게 록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 같은 악기는 곡의 중심적 요소가 아니라 앰비언트적인 요소로 쓰인다.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정말 실험적인 사운드를 추구한다.

다만 해체라는 말이 곧 부정이라는 단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 록은 록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자들이 모더니즘의 이성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포스트 록도 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록 음악 이후의 것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포스트 록 뮤지션들마다 달랐다. 누구는 드림팝, 누구는 슈게이징... 그렇기에 포스트 록은 아직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정립하지 못했다. 아직 잡다한 것들이 난립한 형태다. 저마다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포스트 록은 록의 전형성을 해체하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것들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런 실험정신의 최전선에는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가 있었다. 그들이 지금과 같은 자리에 위치하기 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화처럼 소문만이 떠돌아다니는 첫 앨범이 존재했다. 바로,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이다. 이 전설적인 앨범은 과연 어떤 음악을 담고 있었을까?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
이 밴드는 1994년에 결성되었고, 1997년에 앨범 <F♯ A♯ ∞>을 처음 발매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그리고 이어서 2000년 10월 9일에 발매한 2집 스튜디오 앨범인 <Lift Your Skinny Fists Like Antennas to Heaven>은 포스트 록계를 완전히 뒤흔든다.

이 앨범은 포스트 록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통일된 사운드를 가지게 된 계기가 된 앨범이다. 또한 음악의 '곡' 개념을 넘어서 클래식처럼 거대한 흐름과 서사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인데, 이 앨범 이후 포스트 록 밴드들은 이 앨범처럼 영화적인 감정 곡선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다. 또한 크레센도 형식(조용한 시작 → 빌드업 → 클라이맥스 → 잔잔하게 마무리)의 전개 방식을 정립했는데, 이는 이후 다른 밴드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영화적이고 웅장한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듯했다.
-오스틴 크로니클(The Austin Chronicle)
즉, 갓블레스 유! 블랙 엠퍼러는 포스트 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힌, 그야말로 포스트 록의 전설 중 하나인 밴드다. 그런데 그들이 1994년에 단 33장만 발매해 지인에게만 돌린, 그래서 더 이상 들어볼 수 없는 앨범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는가? 포스트 록의 전설이 처음 만들었다던 앨범. 모두가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전설의 앨범,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
1994년, 갓블레스 유! 블랙 엠퍼러는 에프림 메넉(Efrim Menuck), 마우로 페젠테(Mauro Pezzente), 마이크 모야(Mike Moya)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이라는 앨범을 33장의 카세트로 수제 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앨범에 대한 공식적인 정보는 없었고, 소장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알려진 유일한 사본은 그들의 레이블인 컨스텔레이션 레코즈에 보관된 1장. 그것도 재발행 계획은 없었다. 그저 몇몇 인터뷰와 음악 커뮤니티의 언급을 통해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후 갓블레스 유! 블랙 엠퍼러의 성공으로 인해 이 33장의 카세트 테이프는 그야말로 컬트적인 명성을 얻었다. 혁신적인 사운드, 한 시대와 장르를 대표하는 앨범을 만든 밴드. 과연 그들이 데뷔 전에 내놓았던 초창기 사운드는 어땠을까. 심지어 실제로 들은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신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밴드 본인들도 이 앨범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 전설의 앨범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후 포스트 록 장르의 팬들은 이 앨범을 찾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도 앨범은 공개되지 않았다.

2013년, 레딧의 한 사용자가 테이프 사본을 구입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올린다. 그는 카세트 박스와 A면의 마지막 두 곡의 사진을 업로드했다. 그러나 그 유저의 레딧 계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되었고, 이에 일부 매체에서는 발견했다는 주장이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었으나 2022년 2월 4일. 4chan의 /mu/ 게시판에서 한 유저가 뜬금없이 이 앨범의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MEGA 파일 링크를 업로드한다. 음반은 총 27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었고, 미공개곡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것이었기에 다들 반신반의했고, 컨스텔레이션 레코즈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는 이 앨범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22년 2월 14일, 사전 예고 없이 밴드캠프 페이지를 통해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을 공개하면서 신화 속 주인공만 같았던 전설의 앨범을 발매한다. 이들은 판매 수익금 전액을 가자 지구에 의료용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Canadians for Justice and Peace in the Middle East의 캠페인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에프림 메넉은 팟캐스트를 통해 인터뷰를 했고, 다음과 같이 밝힌다.
카세트를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끄럽지도 않고요. (중략)
그건 갓스피드가 아니에요.
-에프림 메넉(Efrim Menuck)
그렇다면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공개된 포스트 록의 성배인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은 어땠을까. 과연 그들이 그동안 구축한 신화적인 이미지에 걸맞은 걸작 앨범이었을까?

신화는 사라지고,
신화는 사라졌다.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은 기존에 알려진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의 사운드와는 매우 다른 스타일로, 거친 로파이(Lo-Fi) 녹음, 노이즈, 실험적인 사운드를 도입했다. 특히 첫 번째 테이프는 난잡한 노이즈 기타를 곁들인 가벼운 데모처럼 들렸다. 가사도 인상적이지 않았으며, 곡 구성 역시 한 편의 서사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들의 다른 앨범에 비해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앨범 전체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와 다른 것은 아니다. 두 번째 테이프의 앰비언트와 어두운 분위기는 이후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의 서사적이고 감정적인 스타일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필드 레코딩, 스포큰 워드 사용 등은 이후 그들이 확립한 형식과 유사한 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이 앨범은 우리가 알던 그들의 음악과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으며 전설의 한 챕터를 마무리했지만, 음악적으로 팬들이 기대했던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소 실망스러운 퍼포먼스였다. 이에 Fantano는 "완전히 무의미한 발매는 아니지만, 팬들이 기대했던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결론: 전설은 전설로 남는 편이 좋았을까?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신화 속 존재였던 앨범은, 막상 공개된 후 기대했던 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명반은 아니지만, 우리는 전설이 된 밴드의 초기 음악적 방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서투르지만 다양한 시도를 했고, 그 속에서 현재 밴드가 보여주고 있는 스타일을 일부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있음에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 앨범, <All Lights Fucked on the Hairy Amp Drooling>은 음악 자체보다, 존재하지 않는 동안 만들어진 전설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설은 현실이 되었고, 신비로움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 앨범에 대한 이야기는 포스트 락 씬에서 중요한 이야기로 남게 될 것이다. 음악 자체의 호불호를 떠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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